인지과학전공자 2023. 8. 11. 08:54

대학원 과정 중 교수님들과 선배들이 연구계획서를 작성하는 과정을 보면서 처음에 엄청 놀랐던 기억이 있다. 어떤 연구를 앞으로 해보겠다는 계획서인데 그 내용은 이미 거의 연구를 마친 것처럼, 그래서 진행한 연구결과를 저널에 제출해도 될 정도의 완성된 배경설명과 연구 방법에 대한 기술이 구체적으로 되어 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정도면 연구를 하겠다는게 아니라 이미 끝난거 아닌가? 계획서를 뭐하러 내지?'하는 생각을 했을 정도였다.

어떤 연구사업에서든 연구비 지원을 받으려면 '연구 계획'을 작성해 제출하고 평가받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연구의 주제가 무엇인지, 그 연구가 왜 중요한지, 그 연구는 어떤 방식으로 수행할 것인지, 연구자는 연구 계획에 명시한대로 연구를 수행할 자격과 역량이 있는지, 그리고 이 연구를 통해 밝혀 낼 새로운 지식이 사회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 알려야 한다. 다시 말하면 이 연구에 연구비를 지원할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평가받는 것이다. 대체로 서면과 발표의 형태로 진행된다.

그러니 심사위원들에게 계획한 연구가 허무맹랑하지 않고, 가치있는 지식을 산출할 수 있다는 근거와 논리를 세워야하는 것은 당연하다. 심사위원들로 하여금 이 연구계획서를 채택하고, 지원하는 것에 설득하기 위해서 연구계획서는 충분한 조사와 합리적인 가설 설정, 구체적인 연구방법에 예상되는 결과까지도 포함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혹자는 높은 경쟁률을 뚫고 선정되는 연구계획서를 쓰려면 '이미 진행한 연구'를 쓰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그만큼 충분한 시간을 들여 관련 주제를 리뷰하고, 이미 시행착오를 거쳐 실제 구현이 가능한 연구방법론에 대해 확인하고, 의미있는 지식 산출을 위해 분석방법에 대해서도 고민을 하는 등 연구를 실제 진행한 것과 같은 수준의 구체적인 수준으로 계획서를 기술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처음 이런 과정을 본 나로서는 꽤 놀라운 경험이었다. 당장 뭘 할지, 하다보면 또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일련의 과정을 예상하고 계획을 세운다는 것이 낯설기만 했다. 이제서 돌아보니, 진행하려는 연구주제와 관련된 최신의 논문들을 참고해 연구목적과 목표를 분명히 한다면 '어떻게 될지 모를 것 같던' 부분은 예상이 가능한 범위에서 충분히 계획을 세울 수 있게 된다. 연구를 진행하는데 가장 위험한 것은 '뭐라도 하자'는 마음으로 충분한 준비없이 시작했을 때, 순간순간 보이는 성공과 실패들에 속아 연구 전체가 나아가지 못하고, 해결되는 것도 없이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더욱 연구계획서는 정확한 사실에 근거해 치밀하게 작성해야 한다. 이미 마친 연구에 대해 기술하듯이, 그렇게까지 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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